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문단 편집) == 상황 == ||[[파일:20230729_155904.jpg|width=100%]]|| 서해훼리호는 (주)군산서해훼리([[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3101600099123011&edtNo=16&printCount=1&publishDate=1993-10-16&officeId=00009&pageNo=23&printNo=8561&publishType=00010|참고]]) 소속 여객선으로, 한국선박기술(코리아 머린 엔지니어링)이 [[일본]]의 낙도운항 유사 여객선 10여 척을 모델선으로 하여 기본 설계를 하였으며 군산시 소재 대양조선에서 건조하여 1990년 10월 진수하였다고 한다. 이 선박은 제조 검사를 받은 후 같은 해 10월 26일 관할 관청의 제1회 정기 검사를 받았다. 다음의 영상에서 침몰 전 운항하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https://youtu.be/7AoR7-46ZUw?si=_FtiDC8rCtwuZ7F5|#]] 관련 문서는 아래 링크에서 볼 수 있다. 우선 저 문서에서는 관련 업체들이 필터링되어 있으나 각주에다가 링크한 관련 신문 기사에 "한국선박기술(코리아 머린 엔지니어링)"과 "대양조선"이라고 나와 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3101100289101001&edtNo=5&printCount=1&publishDate=1993-10-11&officeId=00028&pageNo=1&printNo=1699&publishType=00010|관련 기사 1]],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3112100289114002&edtNo=5&printCount=1&publishDate=1993-11-21&officeId=00028&pageNo=14&printNo=1737&publishType=00010|관련 기사 2]],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3102000329123001&ed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3-10-20&officeId=00032&pageNo=23&printNo=14894&publishType=00010|관련 기사 3]],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3112100329118010&ed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3-11-21&officeId=00032&pageNo=18&printNo=14923&publishType=00010|관련 기사 4]]. 특히 이 사고는 안전사고 예방 대책을 소홀히 한 탓에 발생한 전형적인 인재(人災)로 손꼽히는데, 선박 출항 당시 기상 여건이 매우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리한 출항을 감행한 것과 무리한 기기 조작이 사고의 원인으로 분석되었다. 또한 짐이 배 앞부분에만 가득 실려 있었기에 여객선 자체가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해 뒤뚱거리는 상태였고 이 상황에서 무리한 키 조작이 결국 배가 뒤집혔다고 알려졌는데 다른 원인을 분석한 해경도 있다. 또한 당시 사고조사위원의 증언에 따르면 수면에서 부유하던 어망과 나일론 로프 등이 프로펠러에 걸려 우현측 프로펠러가 동작 불능 상태가 되었고 이로 인해 선체가 우측으로 선회하면서 파도를 맞은 것도 전복의 원인이라고 한다. 사고 당일 기상청에서도 '파도가 높고 강풍이 불며 돌풍이 예상되므로 항해 선박의 주의를 요한다'는 방송을 내보냈고,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초 여객선이 정상 운항을 할 수 있는 기상 여건이 아니었다고 한다. 출항 당시 초당 10~14m로 부는 북서풍 때문에 높이가 무려 2~3m에 이르는 파도가 쳤으므로 '''여객선이 출항해서는 안 되는 날씨였다'''. 게다가 정원 외에 무려 141명이나 초과 승선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감독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원래는 이 날 좋지 않은 날씨 탓에 운항하지 않을 예정이었는데 사람들 대부분이 출항하라고 강요했다고 한다. 이유는 후술하듯 당일이 일요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 사고는 전부터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사고가 일어나기 전부터 [[주말]]에는 계속 초과승선한 채로 운항했기 때문이다. 사실 서해훼리호가 처음 운항할 당시에는 주말에도 이용객이 얼마 없었다고 한다. 위도와 육지간 왕래객이 얼마 없는 탓에 하루에 왕복 1차례 운행해도 적자 나는 상황이었던 것. 하지만 이 배가 위도에서 육지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교통 수단이었기 때문에 운항을 멈출 순 없었고 결국 [[농어촌버스]]처럼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고 겨우겨우 운영하던 노선이었다. 이를 낙도보조항로(落島補助航路)라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80년대 후반부터 조금씩 떠올랐다. 위도가 [[낚시]] 명소로 인기를 끌자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낚시꾼들 때문에 이용객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된 것. 주말에는 몇백 명씩 찾아오다 보니 더 이상 왕복 1회 운행으론 감당할 수가 없었다. 서해훼리호의 정원은 221명(승객 207명 + 승무원 14명)이었는데, 주말마다 찾아오는 관광객은 이를 압도했기 때문에 계속 초과승선시킬 수밖에 없었고 사고가 일어나기 몇 달 전부터 이곳을 찾아오던 관광객과 위도 주민들은 운항 횟수를 증편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보조금 받는 영세업체라며 증편 허가를 거부했다. 결국 주말만이라도 증편해달라고 했더니 이마저도 거부했다. 다만 이건 업체의 의지 문제일 수도 있다. 만약 정원초과로 운행하는 노선임을 정부에서 알았다면 증편을 허가하고 보조금 지급을 중지했을 것이다. 업체 입장에서는 굳이 정원 초과로 운항해도 '''그때까진''' 사고가 나지 않았고 증편하면 운항비가 더 들기 때문에 증편의 필요를 못 느꼈을 수도 있다. 이에 대해 꼬꼬무에서 장성규는 "설마 했겠지"라며 이들의 안전불감증을 비꼬았고 방송 말미에서 서해훼리호 이전에 발생했던 과거의 선박 사고를 언급하는 부분에서 다시금 '''"'설마'가 '악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파일:20230729_160100.jpg|width=100%]]|| 결국 운항 횟수를 늘릴 수 없는 상태로 계속 운항을 강행하니 늘어나기만 하는 더 많은 관광객들을 실어 날랐는데 이는 곧 대참사의 원인이 되었다. 또한 여기에 문제가 하나 더 있었으니 마침 또 김장철이라 위도 주민들이 만든 액젓을 내다 팔기 위해 '''멸치액젓 9톤''', 그리고 '''자갈 7.3톤'''까지 실었다. 안 그래도 정원보다 141명이나 더 탔는데 무거운 짐까지 실은 데다 역대급 [[병크]]까지 저질렀는데 바로 '''이 짐들을 내리기 쉽게 하려고 화물칸에 두지 않고 배 첫머리에 두었고''' 이는 배가 중심을 잃게 만드는 주 원인이 되었다. 사실 이렇게까지 날씨까지 안 좋은데 이렇게 운항하면 사고가 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지는데도 승객들이 탈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원인이 있었으니 바로 그날이 '''[[일요일]]'''이었기 때문이다.[* 아직 [[주 5일 근무 제도]] 도입 전이라서 토요일에도 오전까지 일하던 시절이었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 나온 설명에 따르면 당시 탑승객은 대부분 직장인이라 다음날 출근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 같으면 직장에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하고 휴가를 쓰거나 어떻게든 대책을 마련하는 방법이라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당시에는 휴가를 쉽게 쓸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고 한다.] 당시 사고 여객선 승객들 가운데는 직장에서 단체로 여행을 온 사람들이 많았다. 다음날 출근해야 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왕복 1회 운항하는 탓에 그 선박을 놓치면 꼼짝없이 무조건 [[휴가]] 내서 하루 더 있다 와야 했다. 결국 사람이 많았어도 승객들은 출항을 강요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 날 날씨가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위도 인근 해상에는 어떠한 주의보도 발령되지 않았다. 천재지변 때문에 발이 묶였다는 사실을 입증할 증거도 없었기 때문에 강요할 수밖에 없었던 듯하다. 게다가 모든 선박의 바닷물 배수구 크기가 1.661㎡이상이 돼야 하나 서해훼리호는 0.267㎡밖에 안 됐다. 해운항만청이 만재흘수선[* 화물과 승객을 최대한 실었을 때 물에 잠기는 선.]을 부적합하게 지정한 것 역시 한 몫 했다. 선박복원성 규칙에 따르면 선박 안전 운항을 위한 만재흘수는 1.912㎡가 돼야 하나 해운항만청은 2.311㎡로 정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해훼리호는 화물 6.5톤을 실을 수 있도록 함에도 불구하고 40톤을 실을 수 있게 만재흘수선을 지정받았다고 한다. 또한 사고 직후의 대처 또한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선장이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었다는 점은 둘째치고라도 항해사가 당시 휴가 중이었던 터라 '''갑판장이 항해사의 업무를 대신'''했고 안전요원도 고작 '''2명''' 뿐이었다. 항해사 문제는 중요하다. 항해사가 선적하는 짐에 관한 모든 권한을 가진 전문직급이라는 점이다. 그래도 어찌 되었든 선장이 있으니 되지 않겠느냐 싶겠지만, 보통 선장은 그저 보고 받고 사인만 할 뿐이기 때문에 사고의 위험이 극도로 높았던 상황이다. ||[[파일:20230729_160048.jpg|width=100%]]|| || '''침몰 이전 서해훼리호의 내부 모습''' '''승객들 뒤에 구명조끼들이 보인다''' || 심지어 긴급한 상황에서 중요한 구명 장비는 제대로 동작조차 하지 않았다. 갑자기 배가 기우뚱거리다가 침몰해서 구명 장비를 꺼낼 틈도 없었다. 몇몇 사람은 침몰할 때 구명 장비가 있는 문 유리를 깨서 이용하여 목숨을 건진 경우도 있었다. 또 사고 직후 위급 상황임을 알린 사람도 없었으며, 구조 요청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인명피해를 더욱 키운 원인이 되었다. 먼저 인명구조에 나선 이는 사고지점 부근에 있던 낚싯배[*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 당시 처음 구조를 간 낚싯배 종국호 선장의 증언이 나왔다. 선장은 여객선이 침몰했다는 무전을 듣고 나서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낚싯배에 탄 손님들을 설득해서 구조에 나섰다고 한다. 낚싯배 손님들은 [[이기주의|처음에는 자기들을 다른 섬에 내려주고 가라며 거절했으나]] "우리는 일단 좋은 공기를 마시고 있는데 그분들(사고 피해자들)은 지금 바닷물을 먹고 사경을 헤매고 있는 처지가 아니냐, 당신들이 그런 처지를 당했다 생각하고 날 믿고 가자"는 선장의 간곡한 설득에 마음이 움직여 다 함께 사고 현장으로 출발해 악전고투 끝에 무려 44명을 구조해 냈다. 이후 종국호는 정원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일단 구조한 생존자들을 데리고 위도로 갔고 종국호에 미처 다 태우지 못한 나머지 26명은 뒤따라서 온 낚싯배와 어선들이 와서 구조했다.]와 어선들이었고 [[해양경찰]], 119 구조대 등은 사고가 발생한 지 거의 1시간 만에 도착했다. 참고로 당시는 휴대전화가 대중화되지 않았다. 아날로그 휴대전화가 있긴 했지만 꽤 비쌌고 무엇보다 디지털 방식인 [[CDMA]]가 나오기 전이라서 민간에 활성화되지 않았다. 그래서 침몰하는 선박은 유선 전화기를 쓸 수밖에 없었는데 하필이면 침몰 중이라서 유선 전화기가 작동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배의 내부에는 발전기가 있지만 침몰 중에는 발전기도 침수되기 때문에 전기가 끊긴다. 게다가 사실 배 또한 낼 수 있는 속도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항시 [[대한민국 해군|해군]] [[참수리급 고속정]]이 호위로 붙는 서해 5도 여객선 따위가 아닌 한 구조 요청 전화를 받았다고 현장에 몇 분 안에 나타날 수 없다. 길거리에서 [[교통사고]] 났을 때 근처에 지나다니는 차량들이 대부분 민간 승용차들인지, 경찰 순찰차나 소방 구급차인지를 생각하면 편하다. 결국 '''탑승객 총 362명 중 무려 292명이 사망'''하는 처참한 결과가 일어났다. 당시 여객선사 측이 승객을 무리하게 초과승선시킨 바람에 시신이 무리지어 발견되는 등 워낙 인명 피해가 심했기에 [[한겨레]] 1993년 10월 12일자에 실린 [[박재동]] 화백의 만평은 폭풍이 휘몰아치는 바다 위에서 사신이 여객선을 바라보며 '''"이제까지 괜찮았잖아, 괜찮아 출항해 옳지, 옳지"'''하고 설득(?)하는 내용이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3101200289102006&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3-10-12&officeId=00028&pageNo=2&printNo=1700&publishType=00010|#]] 구명 장비가 없어 아이스박스에 매달려 목숨을 건진 사례도 있어 '배를 탈 때는 아이스박스를 가져가야 한다.'는 뼈 있는 유머가 유행하기도 하였다. 20년 전 [[남영호 침몰사고]]의 생존자 중에도 바다에 떠다니던 귤 박스를 부여잡고 매달려 살아난 사람들이 있었다.[* 해당 사고 문서에도 서술되어 있지만, 당시의 귤박스는 지금처럼 종이박스가 아닌 나무상자였다. 이 덕분에 사람 한 명 정도는 버티고 떠있을 수 있었다.] 심지어 21년 후의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사건]]에서는 구명장비를 비치해 놓고도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거나 작동하지 않아 많은 승객들이 사망하기까지 했으니 구명 장비의 관리 문제에서 정말로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다. 사실 저런 사고를 당했을 때는 아이스박스 같이 부력이 큰 물건에 매달려 있는 것이 한 가지 대처 요령이기 때문에 유머로만 치부할 일은 아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